십이신왕전기十二神王傳奇 - 1. 대면하다

 

 

언제부터 자신이 튕기는 데로 굴러가는 공 같은 신세가 되었는지…….

당하는 장본인으로서는 매우 통탄스러울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명색이 신왕이라면서도 겨우 그림 한 장에 봉인되어 버린 민폐스러운 존재들 덕분에 현재 차원의 존망이 위태롭다고 하니. 물론 ‘남의 일’ 가지고 꿈쩍할 서랑은 아니었지만 그 차원 중에 다름 아닌 서랑과 서유 자매가 살았던 차원이 포함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움직일 밖에.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오붓하게 식사라도 하면서 회포를 풀어 보려 했던 서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아쉬움에 눈물을 글썽이는 서유를 달래는 건 서랑의 몫이었다. 훌쩍거리는 동그란 머리를 토닥거려주면서 서랑은 중얼거렸다.

기특한 것 같으니라고. 이게 어디 네 탓이니. 그저 능력 없는 것들 탓이지.

“……어째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옆에서 꽁알거리던 나유카는 여지없이 눈치 백단인 유능한 여 집사의 손에 입이 막힌 채 질질 끌려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알아서 입을 다물고 있는 ‘능력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째려보아 준 뒤, 서랑은 눈앞에 놓인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주에 걸려 휘청휘청하시는 마왕님의 전언을 듣고 난 뒤,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파아몬 성의 중심, 그 중에서도 가장 지하에 위치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서유의 설명에 의하면 그 곳은 사계의 기사들이 이 세계에 계절을 불러올 때 사용하는 곳으로 [계절의 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만능 네비게이션처럼 서유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코스를 지정해 주는 파아몬 성 덕분에(서랑은 건물 주제에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이없어했지만) 일행은 순식간에 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과연 그 이름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전체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방은 커다란 정육면체의 형상을 띠고 있었는데, 각각의 면마다 하나의 수정 기둥이 세워져 있는 형태였다. 네 면마다 사계절의 모습이 벽 위에 은색 선으로 마치 그림을 그린 듯 새겨져 있는 모습이었으며 기둥까지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절묘하게 조화되는 방은 전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할 만해, 서랑마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방의 중앙에 작은 샘처럼 물이 고여 있고, 그 위로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사계의 기사들과 호데시가 세계에 계절을 불러올 때 쓰인다는 제단이다. 투명하기 그지없어 밟기조차 두려울 정도인 유리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은 차분하게 걸어 올라간 서랑은 먼저 와 있던 호루게센과 시선을 마주했다.

차원과 차원을 건너는 것은 관리자만이 가능하나, 관리자의 허락이 있다면 차원에 속한 생명체도 차원 이동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리자가 모든 차원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뎃사의 말에 의하면, 관리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차원과 근접해 있는 다른 차원들까지만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전(全)차원 이동이 가능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라고.

그게 누구냐고 묻는 서랑의 질문에, 오뎃사는 웃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이어진 대답이었다.

……대체 이놈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수수께끼 놀이를 왜 이렇게들 좋아하는지. 서랑은 자신이 단순한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실한 답을 놔두고 빙빙 돌아가는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이었다. 직선으로 가는 길을 놔두고 왜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여전히 졸린 듯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는 마왕이 서랑의 중얼거림에 마지못해 시선을 주었다. 보라색, 아니 자주색이라고 불러야 하나. 붉은 기운이 서려 있는 말간 자색 눈동자는 마치 보석 같다. 이런 상태만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아주 예뻤을 텐데.

“날 그 세계로 데려가겠다니, 의외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나 보지?”

“……?”

“관리자의 힘이 미치는 곳 근처로만 이동할 수 있다며. 그렇다는 것은 당신이 왔다는 곳―마계와 가까운 곳에 그 차원이 있다는 소리 아냐?”

당돌하게 던져진 질문을 듣고 있던 호루게센이 순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멍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놀랄 만큼 요염한 얼굴로 변해 버리는 바람에 서랑은 움찔했다. 역시 ‘마(魔)’자 붙는 것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좋아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모른다.”

“―엉?”

그래놓고선 나온 대답은 그야말로 단칼에 무 자르듯.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에 서랑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입장을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마왕님의 대답은 계속되었다.

“나는 단지 심부름꾼일 뿐.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차원을 건너는 것은 내 입장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 아기사하트의 경우는 단순히 내 영지 옆에 위치한 차원이므로 차원의 벽이 약해질 때를 노려서 왕복하곤 했지만, 이번 경우는…… 글쎄.”

“이봐, 그러면 지금 생판 모르는 곳으로 날 데려가겠다는 거 아냐? 무슨 이런 무책임한 경우가 다―!”

그러나 무어라 퍼부으려던 서랑의 말은 뒤이어 터져 나온 빛에 의해 중단되었다. 어느새 제단의 주위를 둘러싸고 선 사계의 기사들, 그들이 선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왕의 부탁으로 아기사하트를 감싸고 있는 차원의 벽을 열어 주는 것이다. 실드 일레이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호루게센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기에 사계의 기사들의 힘을 빌어야만 했던 것이다. 일단 벽만 열어준다면, 나머지는 가고자 하는 이의 의지대로. 물론 그 안내자라는 인간이 실은 지리(?)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서랑의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의 뜻은 소설 전개를 위해서라면 항상 무시당하기 마련. 당사자가 안에서 절규하든 말든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계의 기사들로부터 시작된 빛은 홀의 벽면에 반사되면서 점점 더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제단 정면에 선 호데시의 몸에서 발산되는 빛이 합세하면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빛의 홍수가 서랑과 호루게센의 몸을 감쌌다.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힘들 정도의 상황에서, 서랑은 문득 자신의 몸이 점차로 투명해지는 것을 보았다.

빛 바깥의 풍경은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멍해지는 정신 속에서 서랑은 외치듯 말하는 서유의 목소리를 들었다. 부디 조심하라고. 다시 또,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 목소리에는 확연히 알 수 있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기에 서랑은 미소를 지었다. 여린 녀석 같으니라고. 막내라서 그런지 작은 일에 쉽게 감동하고 눈물 많고, 어리광 많은 동생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서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골치 아픈 일이 끝나면 꼭, 다시 만나자꾸나.

이내 눈앞을 스쳐 가는 현란한 빛줄기―여름의 붉음과 초봄의 싱그러움, 겨울의 냉막한 은빛, 그 후에 화사하게 퍼져 가는 가을의 금빛 속에서, 서랑은 문득 오뎃사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뎃사, 그는 끝내 서랑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만 우십시오. 호데시.”

눈앞을 하얗게 퇴색하게 만든 빛이 마침내 사그라지고 제단 위가 텅 빈 것을 보았을 때부터 터지기 시작한 서유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힘들게 만난 가족과 하루를 채 넘기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에 태연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손수건으로 닦다 못해 종내는 옆에 있는 기다란 모피 망토를 끌어다 눈물을 닦는 것에 오뎃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졸지에 호데시의 손수건 신세가 된 시올린드만 묵묵히 먼 산을 볼 뿐.

“괜찮을 겁니다. 꼭 다시 만날 테니까요.”

“…….”

말로 하지 않아도 ‘정말?’이라고 묻는 듯한 동그란 눈동자는 토끼처럼 발개져서는 눈물만 그렁그렁했다.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오뎃사는 부드럽게 서유의 뺨을 쓰다듬었다. 서랑에게 할 때와는 딴판으로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다.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도 뭐든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녀. 이 세계 자체에게 사랑받고 있는 그들의 호데시인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그 분은 안전합니다. 호데시처럼, 그 분 또한 선택받았으니까요.”

비록 원해서 한 선택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십이신왕. 거대한 힘을 지닌 열두 지배자를 무려 ‘재창조’해 낸 유일한 인물이니,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녀는 십이신왕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은 모르고 있으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이 지닌 지독히 유혹적이고도 위험한 의미를.

그 증거가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오뎃사는 저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서유가 의아하게 쳐다볼 만큼.

“호루게센이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속 졸리게 만드는 것 아냐?”

“호루게센 정도 되는 존재라면, 평범한 힘이나 마법으로는 저주를 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저토록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도 없지요. 저런 경우는 단 하나, 해당 속성을 지닌 존재의 힘을 빌렸을 때뿐입니다.”

“정령?”

“아니요. 제 생각입니다만…….”

몽마(夢魔).

꿈에 기생하여 사는 생명체이며 그 형체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으나 고위급일수록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마왕급의 마족을 저토록 비실거리게 만들 정도라면 과연 누가 저주를 건 건지는 모르겠어도, 틀림없이 상당한 고위급 몽마의 힘을 빌렸을 것이다.

그러나 고위급 몽마라고 해서 항상 강한 것은 아니다. 오뎃사의 말대로 그들은 어떤 ‘속성’에 속하는 존재. 정령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힘은 그 속성에 한해서만 강대해지며, 그것은 즉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속성의 ‘근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근원이 없다면 당연히 그들의 힘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서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왕 같은 것이려나?”

“글쎄요. 어쨌든 우리와 그다지 관계가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서랑 님의 경우는 어떨까요. 애매모호하게 중얼거린 오뎃사는 텅 비어 버린 제단 위를 바라보다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빨리 깨닫느냐 아니냐가 앞으로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 미리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뭐 서랑의 말마따나 수수께끼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그렇게 미소 짓다가 뒤이어 한숨을 쉬는 그를 보고 서유가 이유를 물었다.

“뭐 본인도 모르는 새에 보호받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군요.”

“문제라니?”

“서랑 님 못잖게 신왕들도 고집이 세답니다.”

우연이라곤 하나 서랑이 그들에게 육체를 부여했으니, 신왕들에게 있어 서랑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간섭을 할 수 있는 존재이자 그들을 새롭게 탄생시킨 모체, 즉 ‘어머니’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진짜 어머니가 아닌, 비유적인 의미로서 그렇다는 것이지만.

“어머니나 자식들이나 똑같이 고집이 세서, 과연 깨우러 간다 해도 순순히 말을 들을 지가 의문입니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자식이라 해야 할지.”

“방금 그 말은 울 언니가 신왕들의 엄마라는 소리?”

“……서랑 님께는 비밀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오뎃사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분명 들으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 말고도 이쪽엔 할 일이 많답니다. 서랑 님이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고, 그들에겐 한 차원의 관리자로서의 의무가 있는 만큼.

“최근엔 ‘타메보다 더 사악한 존재’가 나타나는 바람에 고민입니다. 시올린드에게 순찰을 부탁해야 할지도요.”

“그건 또 뭐야?!”

“알아본 바로는 타차원에서 씨앗 인간들과 여제인지 여 황제라든지……? 그런 이들을 수호하는 존재라던데, 좀 더 확인해 봐야 할 듯싶습니다.”

“수호하는 존재가 왜 타메보다 더 사악한 건데?”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다른 기사들에게 다가가는 오뎃사를 멀거니 쳐다보다, 서유는 다시 제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물은 이미 다 말라 버린 뒤였다.

“……연애 상대도 아니고 무려 자식이라니, 울 언니도 고생길이 텄네.”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 시각, 누군가가 못마땅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는 것은 아직은 비밀.

 

 


>>퀸의 한마디
-system// [차원에서 미아가 된]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이러는 건 아직 너무한 것 같고......^^;

불안불안하지만 어쨌든 언니님은 동생의 차원을 떠났습니다. 본격적으로 여행 시작이라고 보기엔 조금 부족하군요. 지금은 일단 신왕들의 차원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간 거라서.......
마왕님이 제대로 길 안내 하지 않으면 돌려차기 다음으로 코브라 트위스트가 작렬할겁니다.
M한테 격투기 쓰면 좋아할라나??ㄱ-

덧, 이럴려고 미리 양해드렸지요^^ 등장 감사합니다. 유*카 님.
참고로 이건 유*님의 꿈 얘기를 듣고 살짝 집어넣은 거라지요. ‘타메보다 사악한 존재’를 만나게 되면, 그때는 여제마마도 등장할려나요?
(유*카 님 꼬셔볼까.....)

믿을 수 없는 다음 회 예고.

 

“우리 하숙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아~!!!!”
“.......***이라는 게, 저렇게나 할 일 없는 것들이었어?”
“나한테 묻지 마라.”

“........귀찮은 일을 떠맡기셨군요. 그 망할 대공전하.”
환하게 웃는 얼굴 저편에서, 문득 살기가 너울거리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단지 착각이었을까.

 

-그럼 다음 편에서!

by 스페이스퀸 | 2008/09/06 13:28 | 十二神王傳奇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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